반가사유상, 그리고 반야심경

#buddhism

안녕하세요, 새해 첫 글을 적어봅니다. 새해맞이 결심 중 하나는 꾸준히 불교 공부하기 입니다. 저는 주로 출퇴근 시간을 활용하여 책을 읽는데 보통 두 권의 책을 번갈아가며 읽습니다. 그 두 권의 책 중 하나는 불교 책으로 선택하려 합니다. 무언가 익히고 습관으로 만들기 위해선 꾸준히 시간과 관심을 들여야 합니다. 한번 익히고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면 금방 잊어버리고 안 배운 것과 마찬가지인 상태로 돌아가 버리더군요. 불교도 그렇습니다. 가슴을 울리는 이야기들이 가득한 불교 관련 책을 읽다보면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나도 수행하여 무명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데, 책을 읽고 나서 별 생각없이 뉴스와 신문으로 세상 이야기를 듣다보면 다시 마음은 경계로 가득차고 내것에 집착하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짧은 시간이나마 꾸준히 하루에 몇 줄씩은 불교 혹은 명상에 대한 책을 읽으려 하는 것이죠.

최근에는 자리에 반가사유상을 두었습니다.

Statue

눈길이 반가사유상에 가 닿을 때마다 마음을 돌이켜보려는 마음에서 였습니다. 불필요한 지출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는데 마음을 닦는데 도움이 된다면 아깝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반가사유상 옆엔 “반야심경”을 필사해 두었습니다. 한문 반야심경, 반대쪽은 우리말 반야심경입니다. 군대 훈련소엘 갔을 때 주말엔 종교활동을 하는데 저는 그때 불교를 선택했습니다. 그땐 지금보다 불교에 관심은 적었고 그냥 체험해보고 싶다 정도였습니다. 불교 종교활동 중 하나가 반야심경 외우기였습니다. 그땐 다 외우고 잘 암송했는데 세월이 지나며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땐 뜻을 잘 모르고 그냥 외우기만 했는데 이번엔 뜻을 익히고 곱씹으며 외워볼 생각입니다.

반야심경을 필사하며 간단히 찾아봤는데 사실 “반야바라밀다경”이 원래 텍스트고 600권에 달하는 분량이라고 합니다. 워낙 방대한 양이다보니 이를 축약해서 만든 경전들이 있는데 ”금강경“, ”반야심경“ 등이 이런 경전들에 해당합니다. 대승 경전에 속하고 공 사상을 주된 내용으로 다룹니다.

위키피디아 항목에서는 아래와 같이 설명합니다.

공(空)은 존재물(存在物)에는 자체(自體) · 실체(實體) · 아(我)라는 것이 없음을 뜻한다. 이 교의는 이미 고타마 붓다 당시의 원시불교에서, 모든 현상은 인연소생(因緣所生), 즉 인(因)과 연(緣)이 가적(假的)으로 화합해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아(我)라는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 불교의 근본적인 입장인 제법무아(諸法無我)에 해당한다.

즉, 각 개인 자신의 존재를 포함한 모든 존재(”법”) · 法”)는 인연(因緣)에 따라 생기(生起)한 것이기 때문에 연기”)(緣起)의 법칙에 의해 지금 존재하고 있다는 측면에서만 그 존재성이 가적(假的)으로(임시적으로) 인정될 수 있는 것(”오온의 가화합”)이며, 실제로는 거기에는 어떠한 항상불변(恒常不變)한 자아(自我)나 실체(實體) 같은 것은 없는 제행무상 · 제법무아이며, 때문에 모든 것은 “공(空)“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위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공은 이미 부처님이 설한 내용을 다시 일컫는 것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불교 공부의 어려운 부분 중 하나는 이해와 체험의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경전을 공부하고 익힐 수 있지만 그 내용이 현실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보이는지, 자신 스스로에게는 어떻게 적용되는지는 체험의 영역에 있습니다. 또한 인간이라는 개체에 새겨진 진화적인 특성과 사회에서 부과하는 집단 의식이 수행을 어렵게 합니다. 어떻게 보면 불교에서 말하는 수행은 자연을 거스르는 방향으로의 수행일수도 있겠습니다. 야생의 동물들을 보면 내것을 만들기 위해 악다구니를 쓰며 살아갑니다. 인간도 별 수 없는 동물이니 이렇게 악다구니를 쓰며 살아갑니다. 다만 그 악다구니의 모습이 다를 뿐이죠. 동물들은 서로 물어뜯고 잡아 먹고 먹히는 일차원적인 경쟁을 한다면 우린 좀 더 미묘한 경쟁을 합니다. 더 빠르게 정보를 얻고 익혀 유리한 고지에 올라서고 때론 기만하는 행위를 통해 상대를 밀어 떨어뜨립니다. 어쨌든 더 많은 자원을 확보하려하고 권력을 영향력을 갖고 생존과 번식을 이어나가죠.

불교는, 우리가 동물의 사고에서 벗어나길 바라고, 더 나은 개인과 사회를 위한 시각을 갖추기를 권하는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변하고 영원한 것은 없으며, 나라고 하는 것조차 여러 부분들이 모여 지금 이순간 잠깐 일어나는 것이니 손에 붙잡고 있을 것이 없습니다. 또한 세상 모든 것들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서로의 조건과 결과가 되면서 얽혀있으니 더더욱 나라고 할만한 실체가 없습니다. ..라고 말하기는 쉬운데 역시 삶을 살아가다보면 이런 건 다 잊어버린 채 성내고 어리석은 행동을 하며 후회를 합니다.

그래도 하나 위안이 되는 건, 깨달음이 라는 것이 멀리 있지는 않다는 사실입니다. 책 ”깨달음 이후의 빨랫감“은 수행을 오래하여 성취를 이룬 구도자들의 삶을 살펴봅니다. 우리가 예상하기로는, 깨달음을 얻는다는 건 마치 강을 하나 건너 저편으로 가버려 더 이상 번뇌에 시달리지 않는 상태로 바뀌는 이분법적인 변성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런 구도자들 역시 다시 번뇌에 시달리고 깨달음을 놓치기도 한답니다. 평소와 다르게 한번 생각을 돌이켜, 화내려는 마음을 알아채고 화내지 않는 그 순간에 깨달음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