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버리는 날

주말이 되어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날이면 밀린 집안일을 한다. 하지만 미룰 수 있는 집안일은 많지 않다. 매일 설거지 거리와 빨래 거리는 만들어지기 때문에 식기세척기와 세탁기 건조기 돌리는 일은 매일 시간 날 때 돌린다. 평일 어떤 날은 아이가 놀아달라고 하여 놀다가 시간이 가버리기도 하므로, 그리고 금요일 저녁엔 주말로 집안일을 미루기로 하므로 주말에도 설거지와 세탁은 이어진다. 평일엔 집안일 할 시간이 빠듯하다. 오전 6-7시쯤 출근하러 집에서 나서고 퇴근하고 집에 오면 오후 7시 조금 넘는다. 아내와 식사를 마치면 8시쯤 되는데 아이는 오후 9-10시쯤 잠들기 때문에 1-2시간 밖에 시간이 없다. 아이가 혼자 놀고 있거나 영상을 보는 시간, 짬내어 설거지 하고 어질러진 거실을 정리한다. 재활용 쓰레기가 많이 쌓이면, 음식물 쓰레기통이 차면 그것도 얼른 내다 버리고 온다. 집이 좁아서 아이가 잠든 후 집안일을 하기 어렵다. 더 넓은 집으로 이사가면 기대하는 부분이 아이 잠든 사이 집안일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가용 시간이 많아질테니 집도 좀 더 정돈되겠지. 엉덩이를 잘 붙이고 있지 않고 분주한 편이라 계속 할일이 눈에 띄고 그럼 또 일을 이어나갈 수 밖에 없다. 주말은 한발자국 더 나갈 수 있는 날이다. 매일의 집안일은 그저 현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에너지 투입이라면 주말은 그 상태에서 약간 더 깨끗해질 수 있는 날이다. 안 쓰는 물건을 나눔하거나 오늘 같은 경우는 책을 정리했다. 알라딘 중고서점에 팔 생각이었는데 반은 매입 불가여서 오늘 꺼낸 책들 중 반은 팔고 반은 기부하거나 버려야 한다. 이렇게 해도 아직 처분할 책들이 더 많다. 책을 하나 둘 사모을 땐 생각치 못했는데 책을 처분하는 것도 쉽지는 않구나. 아마 가장 쉽게는 집 근처 재활용 처리장에 폐지로 처분하는 것이겠지만.. 나는 늘 맥시멀리스트였는데 요샌 미니멀리즘 책을 읽으며 불필요한 물건들을 정리해보려 한다. 여러 미니멀리즘 책을 읽어보면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게, 미니멀리즘은 단순히 물건에 대한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건을 갖거나 버리거나 는 표면의 모습이고 사실은 가치에 대한 개념이다.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건 그 물건에 투영하고 있는 감정, 생각 때문이다. 나는 보통 “언젠가 쓸 수 있겠지” 라는 마음과 그 물건 이 나의 자아의 일부를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잘 버리지 못했다. 특히 책은 그 두가지가 같이 작용한다. “나는 이런 주제에 관심이 있고 이런 지식을 갖춘(갖출) 사람이야” + “지금은 어렵지만 여유가 생기면 분명 읽을 수 있을거야”. 하지만 변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예전의 관심과 욕심은 지금과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리지 못한 책들은 그저 그 시절의 망령이고 미련인 것이다. 물건을 정리하는 일은 선택과 집중을 하는 것이다. 관심있는 모든 걸 익힐 수도 없고 그럴만한 시간도 없다. 깊이를 챙길 수 없음은 물론이다. 그러므로 물건을 정리하는 일은 자신을 되돌아보고 자신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일이다. 지금 읽는 책의 조언 중 하나는, “물건을 버릴 때 창의적이 되지 말아라” 가 있는데 그건 물건을 버리기 아쉬워서 다른 사용처 등을 생각해내는 일이다. 이를테면 과자가 들어있던 예쁜 틴케이스를 잡동사니를 담아두기 위한 용기로 사용한다던가. 나의 관심사인 (혹은 관심사 였던) 것들로 시각예술, 전자공학 만들기, 수학-물리 이런 것들이 있는데.. 이들을 한데 묶어 사용할 수 있는 걸 생각했다. 그건 컴퓨터-인터랙션 예술. 아끼는 필기구와 노트 혹은 노트 앱으로 아이디어를 정리해야 하고, 결과물로 전자공학이 가미되어야 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AI라도 사용할라치면 수학-물리를 알고 있는 편이 도움이 되리라. 그럼 이제 별로 버릴 것이 없어진다. 오늘 책을 버리면서.. 나의 책을 100권만 남기는 걸로 대강 목표를 세웠었는데 책들의 수효를 보니 굉장히 도전적인 목표였다. SF 소설 책들은 남기고 싶은데 아마 그것만 하여도 50권은 채워질 것 같다. 책 버리는 일은 10번은 이어져야 하지 않을까. 물건 버리는 일이, 선택과 집중하는 일이 녹록치 않다.